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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茶器

  명대명도공(明代名陶工感賞)


唐代白瓷茶碗 중국의 음다법의 변천을 살펴보면 당나라때 다성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에 "차를 마시고자 할때 장육기(藏育器)에서 병차(餠茶)를 꺼내어 대젓가락 또는 쇠젓가락에 쥐고 불에 가까이 대어 뒤쳐가며 바싹 마르도록 굽는다.

이렇게 하여 쭈굴쭈굴할 정도로 부풀어오르게 구워지면 미리 준비한 종이로 싼 후, 차가 식으면 조금씩 부스러뜨려 가루분말로 만든뒤 비단체로 쳐내어 합에 담은 후 차 끊이는 준비를 한다.

다솥에 물을 부어 끓인 후, 가루분말을 넣고 다시 끓인다. 삼비(三沸)일때 잔에 부어 나누어 마신다" 라고 했으면 이런 음다법이 자차법(煮茶法)이다. 이때 사용된 잔은 우리가 지금 물을 마실때 사용하는 물컵과 비슷하며, 왼쪽에 있는 잔이 자차음다법에 적합한 잔이라고 생각된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약 53년동안 5개의 단명(短命)왕조인 격동의 오대(五代)를 거치면서도 차문화는 계속 발전하여 탕사(湯社) 라는 차 모임이 결성되었다.

다인들은 이런 탕사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모여 차문화의 교류, 보급 또는 차의 품질을 비교 시합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송나라에 이르러 크게 유행한 투차(鬪茶)라는 차시합의 모태(母胎)가 되기도 했다.

송나라로 넘어온 후 차에 대한 많은 변화가 나타났는데 당나라때 떡차(餠茶)가 오대를 거치면서 점차 단병차로 발전되었으며, 음다법도 자차법(煮茶法)에서 점차법(點茶法)으로 변해갔다.

점차법이란 다마(茶磨)에 부드럽게 잘 갈은 덩어리 단병차 가루를 차솥에 넣지 않고 차사발에 차가루를 직접 넣고 끈적하게 만든 후 적당한 양의 뜨거운 물을 부어 다선이란 다구를 이용하여 잘 휘져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음다법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는 후일 일본 말차(沫茶)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당나라때 단맛을 내기 위하여 소량의 소금을 첨가했으나, 소금을 첨가하면 운각(雲脚)이라는 거품들이 쉽게 흐트러지기에 소금을 첨가하지 않았다. 그 후 차마시는데 소금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점차음다법(點茶飮茶法)으로 인해 차를 마시는 잔도 당나라 시대에 물컵과 같은 입구와 모양이 점차 넓은(다완)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宋代茶碗 송대(宋代)의 차문화가 번창한 이면에 공차(貢茶)의 고급화와 제창 및 공차사(貢茶使)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로 다농(茶農)들의 생활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원대(元代)에 이르러서는 송대에 크게 성행했던 점차법(點茶法)은 조정에서만 음용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주로 산차(散茶)를 즐겨 마셨다.

그 후, 다농들의 생활고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평민출신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단차(團茶)의 제다법을 폐지하는 칙령을 내리고, 공차(貢茶)도 오직 찻싹을 딴 그대로 제다한 엽차를 만들어 진상케한 이후 증청산엽차(蒸靑散葉茶)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근 400년 동안 중국 차문화를 이끌어 왔던 연고차(硏膏茶)의 점차법(點茶法)은 사라지고 포차법(泡茶法)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음다법도 포차법으로 변화화 됨에 따라 마시기 위한 다기(茶器)에도 큰 변화를 보였으며 녹차의 향기와 맛을 보존하기 위하여 보온력이 강하고 냉각속도가 느린 1200℃ 정도에서 구운 사기(砂器)류 보다 조직 사이가 치밀하고 흡수력이 낮으며 보온력이 약한 1300℃에서 구운 자기(瓷器)류를 선호하게 되었고, 점차법에서 요구되지 않은 차를 우리기 위한 다호(茶壺)와 찻잔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뒤 차의 향기와 맛이 찻잎속에 침투해 있는 발효차가 속속 만들어짐에 따라 보다 높은 온도로 우려야 향과 맛을 낼 수 있는 보온력이 강하고 냉각속도가 느린 사기(砂器)류가 선호되었으며, 이런 사기원료로 제작한 다기가 바로 그 유명한 자사호(紫砂壺)이며, 강소성(江蘇省) 의흥(宜興)에서 출품된 자사호(紫砂壺)를 으뜸으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명대에 이르러 자사호가 만들어지기 까지 간략히 음다법의 변천사를 알아보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명대의 자사호의 명도공들을 살펴보자.

최초의 자사호 서적인 양이명호(陽이茗壺-宜興의 옛이름)의 기록에 의하면 "의흥(의흥) 금사사(金沙寺)에 어느 이름 모를 스님이 자사제질의 흙으로 다호를 만든 후 이를 본받아 너도나도 다호를 제작하니 자사호가 크게 유행되었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다인들이 자사호의 시조를 공춘(供春)으로 여기고 있다.

그 뒤 명나라 만력년간(萬歷年間 1573-1620)에 이르는 동안 자사의 초창기 시절에 동한(董翰), 조량(趙梁), 원창(元暢), 시붕(時朋)이라는 4인의 걸출한 자사도공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뛰어난 도공들은 제자를 수없이 배출하고 자사호의 모양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이들 뒤를 이어서 소위 "紫砂壺三大妙手" 시대가 라 할 수 있는 시대빈(時大彬), 이중방(李中芳), 서우천(徐友泉) 등의 삼대묘수(三代妙手)가 배출되었으며,

이중 특히 시대빈(時大彬)이라는 뛰어난 도공의 노력으로 합리적이고 완전한 자사제작 공예와 도구가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 금사사승(金沙寺僧 대략 1506-1566)
강소성(江蘇省) 의흥(宜興) 동남쪽 위치에 있는 금사사의 스님이며 이름은 일(逸)이다. 그는 도공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들로 부터 다호를 제작하는 기술을 익혔다. 최초로 자사 재질로 다호를 만든 장본인이라 전해지고 있다.

  ▣ 공춘(供春 대략 1506-1566)
공춘은 서생 오신산(吳신山)의 서동(書童)이었다. 오신산이 금사사에 머물러 공부하고 있을 때 서동인 공춘이 이 절의 스님으로 부터 자사호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그는 자사 도공의 원조(元祖)라 일컬어지며, 그가 만든 수영호(樹영壺)는 현존하는 최초의 자사호이다.

倣供春壺


  ▣ 동한(董翰 대략 1567-1619)
만력년간(萬歷年間 1573-1620) 자사 초창기에 활동하던 걸출한 4인방 도공. 자(子)는 후계(后溪). 가장 먼저 능화(菱花)형식의 다호를 제작한 도공이며, 아직 발견된 그의 작품은 없다.

  ▣ 조량(趙梁 대략 1567-1619)
만력년간(萬歷年間 1573-1620) 자사 초창기에 활동하던 걸출한 4인방 도공. 그의 다호 작품은 대부분 제량식(提梁式)이었으나 아직 발견된 작품은 없다.

  ▣ 원창(元暢 대략 1567-1619)
만력년간(萬歷年間 1573-1620) 자사 초창기에 활동하던 걸출한 4인방 도공. 원석(元錫), 또는 원석(袁錫)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직 발견된 작품은 없다.

  ▣ 시붕(時朋 대략 1567-1619)
만력년간(萬歷年間 1573-1620) 자사 초창기에 동한, 조량, 원창과 함께 활동하던 걸출한 4인방 도공. 그의 이름 붕(朋)자를 붕(鵬)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수선호육판방호(水仙花六瓣方壺) 작품이 전해지고 있으며, 시대빈(時大彬)의 아버지이다.

  ▣ 시대빈(時大彬 대략 1580-1650)
시붕(時朋)의 아들이며 호는 소산(少山)이다. 자사 제품은 금사사승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시대빈(時大彬) 손에 의해 비로소 꽃을 피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아버지인 시붕을 능가했으며 명(明), 청(靑) 이래 자사의 정통파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이 시대의 문인들이 그의 작품을 가장 소장하고 싶어한 일화가 유명하다. 초창기 그는 공춘(供春)의 다호를 모방했으나, 후일 자신이 창조한 과능(瓜능), 용대(龍帶), 연판(蓮瓣), 인포(印包) 및 개광(開光) 형식등의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은 승모호(僧帽壺), 흑자사호(黑紫砂壺), 옥난화호(玉蘭花壺) 등이다.

時大彬製壺


  ▣ 이중방(李中芳 대략 1580-1650)
시대빈의 제일 제자이며 명도공 이무림(李茂林)의 아들이다. 그가 제작한 다호를 가려켜 속칭 노형호(老兄壺)라 한다.

오늘날 시대빈의 작품 중에 상당수가 이중방이 제작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낙관만 시대빈인 것 뿐이다. 전해진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고능호(고菱壺)이다.

  ▣ 서우천(徐友泉 대략 1578-1644)
시대빈(時大彬), 이중방(李仲芳) 과 함께 자사호삼대묘수(紫砂壺三代妙手)라 일컬어진다. 이름은 사형(士衡)이다. 본래 도공이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친구인 시대빈의 눈에 띄어 사사 받아 도공의 길을 걸었다. 전해진 작품은 삼판삼족(三瓣三足), 삼양환이(三羊環耳), 매화(梅花), 호순(虎錞) 등의 형식이 있다.

  ▣ 혜맹신(惠孟臣 대략 1598-1684)
의흥(宜興) 사람이며 작품의 재질을 주니(朱泥)를 선호하고 작은 크기의 다호를 즐겨 제작하였다. 후세 도공들이 그의 작품인 맹신호(孟臣壺)를 가장 많이 본떠 모방 제작하였다.

대나무칼로 자신의 이름을 낙관하며 다호 뚜껑 안쪽의 낙관은 영림(永林)을 즐겨 썼다. 그는 고신(高身), 이형(梨型), 고복(敲腹) 등 작은 다호들의 작품을 후세에 남겼다. 시대빈 이후 가장 걸출한 도공이기도 하다.

그외에 명도공들은 구정춘(歐正春), 소문금(邵文金), 소문은(邵文銀), 진용경(陳用卿), 진신경(陳信卿), 진중미(陳仲美), 심군용(沈君用), 진준경(陳俊卿), 주계산(周季山), 심군성(沈君盛), 심자철(沈子撤), 서차경(徐次京), 요자(姚咨), 양소옥(梁小玉) 등이 있다.


 - 작성일 : 1998.02.26일

 - 작성자 : 不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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