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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茶文化

  일본 茶道의 宗家(우라센께:裏千家)


Ⅰ. 일본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Ⅱ. 리큐류 다도의 전통

Ⅲ. 우라센께(裏千家)의 가계


Ⅰ. 일본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千利休 일본 다도의 시조는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중흥조는 다케노 쇼오( 武野紹鷗)지만 교조라고 할 때는 센리큐(千利休)를 뜻한다.

리큐는 노아미(能阿彌)의 흐름을 계승한 다인(茶人)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으로부터 다도를 배우고 후에 도친의 소개로 슈코류(珠光流)의 다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케노 쇼오(武野紹鷗)에 사사하여 다도의 극치를 깨우쳤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두 장군 아래서 다두(茶頭)가 되었고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궁중에서 다회를 열었을 때 참여하여 다회의 후견인 역활을 수행함에 따라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천하제일의 다인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다가 1591년 2월 28일 히데요시로부터 자결명령을 받고 자진함으로써 70년의 일생을 마쳤다.

리큐는 다도의 교조로서 뿐만아니라 다도의 수호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다도의 이론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고안을 통해 다실에서 부터 다정(茶亭), 다구(茶具), 다도예법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일상다반의 생활근원을 개혁하여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으로 깊이있게 만들었다.

▣ 리큐의 다도개혁

다(茶) 애호가로서의 여러가지 다사(茶事)개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두가 된 그의 만년에 주로 이루어졌다. 예를들면 리큐는 슈코 당시부터 초암(草庵)의 다실로서 출현한 다실풍의 건물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연구 개량을 가해서 개조했다.

다다미방 내부에 고(菰)천장, 통나무 기둥, 칠벽, 작은 출입문 등 설비를 개량했다. 또 다다미 4장반의 다실외에 다다미 3장, 2장, 1장 반의 작은 방도 만들었다. 다다미 3장의 방은 쇼오 때까지는 명물다도구를 갖지 않은 와비차인 전용의 다실이었으나 리큐의 식견에 따라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다다미 3장, 2장의 작은 다실에서 당(唐)에서 들여온 도구를 사용하여 다회를 개최하는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다미 두장의 좁은 다실은 귀인이나 와비차인 또는 명인(名人)들이 사용하고 한장 반짜리 다실은 명인의 절대공간으로서 은근하고 극비사(極秘事)였던 것이다.

연회석 요리도 선원의 회석(懷石:茶를 대접하기 전에 내는 간단한 요리)을 바탕으로 간소하게 한 결과, 국 두가지, 반찬 세가지를 무거운 요리로 치고 국 한가지, 반찬 한가지를 가볍게 대접하는 것을 통례로 삼았다.

다실에 꽂는 꽃도 호려하지 않은 계절의 초화를 가볍게 꽂는 것을 상(上)으로 치고 봄,겨울에는 엷은 동백꽃, 여름,가을에는 무궁화를 애호했다. 다인의 복장도 다회에 참석할때는 위에 무명옷을 입는다. 도구를 처음 쓰는 다회나 처음 다회에 초청되어 참석할때는 위에 황색의 새 통소매 옷을 입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와비차인은 항상 무명옷, 수수한 종이옷을 입는다.

다회에 나갈때는 휴대품은 띠, 두건, 휴지, 수건 두개, 부채 등인데 매번 새것을 중히 여겼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초대를 받고 갈때는 약간 헌옷을 사용해도 되었다. 또 초청객의 몸가짐으로서 속인은 머리를 땋고 수염을 가지런히 하며, 승려나 불문(佛門)에 귀의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 다인과 다애호가 및 명인

리큐는 먼저 다인으로서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했는데 보통다인, 애호가, 명인의 3단계로 나누었다. 보통다인은 차맛을 식별할 줄 알고 차도 잘 끓이며 다도의 사범으로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애호가는 훌륭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럿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인을 말한다. 명인이란 다도구를 감식하는 안목이 뛰어나고 차도 잘 끓이며 신념, 창의, 업적 세가지를 갖추고 그외에 당(唐)에서 수입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다도에 깊은 의지를 갖는 등 자격을 고루 갖춘 다인을 말한다.

이같은 구분을 보면 리큐시대의 다도는 오늘날과 달리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 차를 끓이는 법

리큐는 차 끓이는 방법도 개혁했다. 말차(抹茶)에는 진한 차(濃茶)와 묽은 차(薄茶)의 구분이 있는데 오로지 묽은 차를 끓여야 하며 그것이 진(眞)의 차라고 하고 있다.

리큐는 60세 무렵까지는 탁자의 차를 진(眞)이라 하고, 풍로(風爐)의 차를 행(行)이라 하며 화로(爐)의 차를 초(草)라고 정했는데 60을 넘은 만년에 이르러 차의 방법이 크게 바뀌었다. 탁자의 차의 고류(古流)에도 정통하고 있는터에 탁자는 애호가에게는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차란 단지 물을 끓여서 차를 달여 마시는 것 뿐"이라는 내용의 리큐의 도가(道歌)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리큐는 묽은 차를 달이는 것이 진(眞)의 차라고 규정하고 진한 차를 진(眞)이라고 하던 종래의 통설을 부인했다.

▣ 다도수행

리큐는 노(일본연극의 일종)의 연습을 모방해서 다도수행을 규정했다. 일정한 연령을 구분해서 각기 적합한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

즉 15세에서 30세까지는 모든 것을 스승하게 맡기고 그대로 따른다. 30세에서 40세까지는 자기 의견을 들여온다. 다도의 관례와 절차, 여러가지 법칙을 연구하는 것도 기초에 관해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10중 5정도는 자기의 의견을 채택한다. 40에서 50에 이르면 대담하게 스승과 반대로 해본다. 스승이 서쪽으로 가면 나는 동쪽으로 간다.

그런 가운데 자기류를 창안해서 훌륭한 다인이라는 평가를 얻게된다. 그리고 50에서 60까지의 10년간은 다시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한잔의 물을 온고히 옮기는 듯이 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도(道)의 명인의 창위와 태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 다인이 조석으로 소리내어 읽는 말

리큐는 다인이 조석으로 크게 읽는 말로 첫째 마음은 물론 다도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다도에 깊은 뜻을 가져야 한다. 둘째 인내, 어려운 일, 싫은 일도 꾹참는다. 높은 도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건 인내를 필요로 한다. 세째 그릇 이는 인격을 뜻한다. 다도의 스승도 인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리큐는 항상 다사를 생계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다도에 몸을 바쳐온 리큐의 순수한 삶의 방식과 그것을 생활의 방편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기개는 사카이라는 자치도시에서 태어난 애호가의 기백 때문이다.

▣ 득도의 객과 주인

어느날 리큐의 제자 남보 소케이(南坊宗啓)가 다사에 있어서 객(客)과 극인간에 서로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물었다. 리큐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게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지않다. 다도를 깨달은 객과 주인이라면 특별히 노력할 필요없이 자연히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된다.

리큐는 "득도의 객과 주인은 주.객이 모두 마음속으로부터 공경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Ⅱ. 利久流 茶道의 전통

▣ 리큐의 죽음

다도의 스승으로서 리큐의 권세는 당시 다도라는 예도(藝道) 자체가 상류무사계급사회에 보급되어 있었던 만큼 일종의 은연한 세력이 되어 차츰 그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외교면까지 뻗쳐있었던 것 같다.

1590년 내란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천하의 대군을 이끌고 관동(關東) 지방에 출장했는데 이때 리큐도 수행했다. 내란이 평정되고 리큐는 먼저 귀경했는데 그 다음해인 1591년 돌연 죄를 뒤집어쓰고 리큐의 자택인 후신안(不番庵)에서 고향인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죄목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다이도쿠지(大德寺)의 산문인 긴모가쿠(金毛閣)에 리큐의 목상(木像)을 안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도구의 감정과 매매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다도스승이라고 칭송받던 리큐는 70세의 나이에 결국 활복자결한다. 리큐가 활복자결하는 현장에는 전날부터 3천명의 군사들이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리큐문하의 다이묘들의 만일의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리큐는 왜 죽어야 했는가? 역사학자, 문화사가들이 여러가지 추측 내지 추리를 펼쳤고 역사소설가는 리큐의 딸을 둘러싼 사건을 들먹 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추측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가장 확실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역시 다이도쿠지(大德寺) 산문의 목상사건과 다도구 감정과 매매에 얽힌 부정사건인데 이는 당시 귀족과 승려의 일기 또는 무사들의 서신 등에도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틀림없다.

그러나 목상과 다도구 사건이 생겼기 때문에 처벌된 것이 아니라 리큐를 처벌하는데 있어서 이 두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서 리큐처벌의 진정한 원인을 대국적으로 추리해보면 전국시대에 사카이 시민의 기골(氣骨)이 참화의 근원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농지 측량과 무기몰수를 통해 농민과 도시상공인으로 부터 생산권과 무기행사권을 빼았는 동시에 일본 전국토를 통일하는 실적을 거둠에 따라 신분법령을 공포, 사농공상의 분리를 꾀했다.

이에따라 사카이란 자유무역도시도 오사카의 위성도시가 되었다. 기백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소상인으로 전략해갔다. 무사를 무사로 여기지 않는 기개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지배층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더구나 천하의 다이묘(大名)를 문하에 거느리고 히데요시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으며 고개를 쳐드는 천하제일 다도의 스승 리큐도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특권을 자랑하는 이 평민출신 다도의 스승이 없어져야할 필요성이 생겨 서둘러 처벌된 것이다.

▣ 다정자(茶亭子) 칠인과 리큐7철(七哲)

리큐 사후 그의 다도는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는데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옛날부터 리큐 7철(七哲)이라고 부른다. 어느날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정자다사를 가졌는데 점다방법이 고법(古法)에 비해 매우 생략되었다. 그 이유를 추궁했더니 리큐는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고법을 약간 개량했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리큐를 칭찬하는 동시에 이 방법을 마음대로 전수하지 못하게 금지시키고 서약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스스로 이 다법을 전수받고 이어 관백(關白:당시 일본 최고위 직책) 7인에 의해서만 상전(相傳)토록 허가했다. 이를 "정자7인"이라고 청했다. 리큐7철의 기원은 히데요시 생존 당시에 정해진 "정자7인"에 있는 것 같다.

▣ 리큐의 평민제자

리큐의 많은 제자 가운데 "정자7인"이니 "리큐7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를테면 리큐의 무사제자였고, 일종의 후견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리큐는 사카이의 평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제자는 이들 무사제자보다는 평민제자 였음이 틀림없다. 즉 사카이 평민다인으로 알려진 산상종이(山上宗二), 주길옥종무(住吉屋宗無), 만대옥종안( 万代屋宗安), 중종보(重宗甫), 하카다의 애호가 신곡종심(神谷宗심)등을 들 수 있다.

▣ 三千家의 성립

종단(宗旦)이 승계한 천가(千家)정통 다도는 그의 손자에 이어졌는데 그의 자식때부터 세집으로 나뉘어졌다. 그것을 3센케(千家)라 한다.

소사(宗左)의 자손을 오코테 센케(表千家)라 하고, 소시쓰(宗室)의 계통을 우라 센케(裏千家)라 한다. 종단(宗旦)의 차남을 이치오 소슈( 一翁宗守)라 했는데 그는 다카마쓰(高松)번의 다두가 되었다. 이 종수 계통의 다류를 무샤노코지 센케(武者小路千家) 또는 간큐안 센케라 한다. 이 오모테 우라 무샤노코지의 다도유파를 3센케류 라고 부른다.

▶ 오모테 센케(表千家)

오모테 센케는 센케의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센리큐로부터 현재 13세 소쿠추사미 소사에 이르고 있다.

오모테 센케의 종가는 현재 경도시 상경구 소천통 사지내상 불심암( 京都市 上京區 小川通 寺之內上 不審庵) 안에 있으며 구전가(久田家)와 굴내가(堀內家)를 두 날개로 하며 명고옥시(名古屋市)의 요시다 다카부미를 표현각(表玄閣)이라 칭하고 도쿄와 오사카에도 연습소를 두어 종가의 스승이 직접 출장교수하고 있다. 교토시의 하원서점(河原書店)에서 "다도잡지"란 기관지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 우라센케(裏千家)

센 소탄(千宗旦)의 4남 선수종실이 아버지 소탄이 세운 다실 곤니치안(今日庵)을 계승, 곤니치안 1세라고 칭한데서 비롯되며 현재의 12세 붕운제 종실(鵬雲齊 宗室)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라센케 종가에서는 센리큐를 1세로 하고 현재 15세라고 부른다.

▶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센 소탄의 차남인 일옹종수(一翁宗守)가 고송번(高松蕃) 송평가( 松平家)의 다두에서 물러나 귀향, 코토의 무샤노코지(武者小路)에 다실 관휴암(官休庵)을 짓고 관휴암 1세라고 한데서 비롯되어 현재 10세 유인제 종수(有隣齊 宗守)에 이르고 있다.

무사노코지 센케는 쿄토를 기반으로 하여 종가의 선조인 인연으로 고송(高松)에도 확고한 지반을 구축했다. 도쿄에는 과거 유호제 종수(愈好齊 宗守)가 직접 출장 지도한 인연으로 주로 지식층간에 보급시켰다.


Ⅲ. 우라센께(裏千家)의 가계

▣ 초조 센리큐(千利休 : 1522-1591년)

센케(千家)의 시조 리큐(利休)는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밑에서 차일을 담당했던 센 아미(千阿彌)를 조부로 사카이(堺)의 상인 다나카 요헤(田中與兵衛)를 아버지로 태어났다. 요헤는 그후 사카이의 아마이치시에서 상인이 되고 요시로(與四郞)를 낳았다. 그가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를 완성시킨 리큐가 태어난 것이다.

14세때 요시로라고 불렸던 리큐가 23세때 소에키(宗易)란 법명으로 등장한 것은 그가 이 무렵에 출가했기 때문이다. 소에키는 17세때부터 차를 즐겨 도진(道陳)한테 배웠다. 도진의 소개로 소구(紹鷗)의 제자가 되었다. 서원정자의 다법은 도진으로부터 배웠고 작은 방에서의 다법은 소에키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 1575년 묘각사(妙覺寺)에서 개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회에서 리큐는 다도역(茶道役)을 맡았다. 노부나가의 돌연한 사망으로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천하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지반구축에 나선다. 이 무렵 리큐가 천하제일의 다도사범의 지위를 확립한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전망이 서자 종구(宗久)와 리큐 두사람을 불러 정자다법을 경쟁시켰다. 여기서 이긴 리큐는 히데요시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게된다. 이 무렵 리큐는 현재 산기(山岐)의 묘희암(妙喜庵)에 전해내려 오는 차분하고 간소한 초암다실(草庵茶室)을 세우고 다도를 발전시켰다.

1591년 리큐의 보호자였던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의 죽음과 함께 대덕사(大德寺) 산문문제가 표면화되었다. 또 히데요시의 정책변화에 따른 사카이 지방의 상인 퇴락과 하카다 시민의 부상으로 1591년 2월 리큐는 돌연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70세에 생애를 자결로 마감했다.

▣ 2세 소암종순(小庵宗淳 : 1546-1614년)

리큐는 1577년 정실부인을 잃었는데 그 사이에 장남 도안(道安 : 1546-1607)을 비롯하여 세딸을 두었다. 리큐의 후실은 전남편과의 사이에 소암(小庵)을 두었는데 소암은 리큐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종단(宗旦)을 낳았다.

소암이 다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형 도안보다 약간 늦다. 소암은 위명을 사랑(四郞) 또는 사랑좌위문, 길병위, 저원조라고 했으며 호는 종순(宗淳)이라 했다. 종단이 태어난 것은 33세 때였다.

1591년 리큐가 자결한 후 소암은 와카마쓰 성주의 보호 아래 그 곳에서 지냈다. 얼마 후 천가(千家)의 재건이 허가되어 본법사( 本法寺) 앞에 집을 얻어 불심암(不審庵)을 재건하고 천가다도( 千家茶道)의 기초를 닦았다.

천가(千家) 2세를 계승한 소암은 1595년 대덕사의 선악종동(仙岳宗洞) 에게 "이휴(理休)"란 호의 뜻을 묻는다. 리큐의 혈통을 이은 종단(宗旦)에게 대를 물려주기로 하고 일찍 은거하였다.

▣ 3세 원백종단(元伯宗旦 : 1578-1658년)

종단은 1578년 정월 초하루에 사카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대덕사의 춘옥화상 아래서 수행을 쌓았다. 그가 14세 때 천가에 중대사건이 일어났다. 조부 리큐의 자결이다. "거지종단"이란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평생 권력층을 섬기지 않고 지낸 것은 이때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라 생각된다.

리큐의 자결로 단절된 천가의 재흥은 뜻밖에 일찍 이루어졌다. 리큐의 생존 당시 히데요시는 자주 리큐의 집을 찾아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있는 종단이 심부름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히데요시는 천가재흥을 종단에게 맡기려했다. 천가를 대대로 이어갈 중책이 종단에게 맡겨진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에 따른 시대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무사들에게 접근했고 왕실귀족과도 교류를 했다. 당시 실력이 신장되었던 평민사이에 다시 일어난 차에 대한 열기에 따라 이들과의 교류도 갖게 되었다.

다다미 두장 넓이의 아주 작은 금일암(今日庵)을 세운 후 은거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세 선수종실(仙수宗室 : 1622-1697년)

종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수종실은 처음엔 의술을 지향해서 의학을 수업받았다. 그런데 그의 의학스승이 급사함에 따라 종단으로 돌아와 리큐직계의 다도수련을 받게 된다.

가하로 간 선수는 이 지방에서 자신이 길러낸 가마솥 제작자와 솥뿐 아니라 종, 갑옷 등을 만들었다. 선수는 1687년 사직원을 내고 교토로 돌아왔다. 북쪽 지방을 여행한 경험이 반영되어 그의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에 많은 풍물을 첨가했다.

▣ 5세 불휴제 상수(不休齊 常수 : 1673-1704년)

상수종실은 가하에서 태어았다. 이 지방 성주의 다두가 되어 있던 선수가 이곳에서 후처를 맞아 이들을 낳았는데 이가 상수이다. 후에 상안이라 바꾸고 호를 불휴제라 했고, 선수사후 종실을 이었다. 그는 1704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 6세 육한제 태수(六閑齊 泰수 : 1694-1726년)

불휴제 상수의 아들로 태어난 태수는 11세 때 아버지를 잃고 리천가 6세로 자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만큼 다도가문을 지켜가는 각오는 각별했다. 한학을 수학하고 취미도 익혔다. 그는 재주가 많고 필체도 뛰어났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 7세 최최제 축수(最最齊 竺수 : 1709-1733년)

종건(宗乾)이 7세가 된 시기는 차가 사회적으로 크게 성행할 때이다. 다도의 확대에 따라 증가하는 다법을 애호하는 평민들에게 다법을 전수하기 위해 茶宗家측에서는 종래와 다른 대응방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천가7가식(千家七家式)으로 제정되었다. 종건(宗乾)은 호를 최최제라고 하기도 하고 축수(竺수)라고도 했다. 그도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도 안한 채 죽었다.

▣ 8세 우현제 일등(又玄齊 一燈 : 1719-1771년)

축수가 죽은 후 이천가를 계승한 사람은 동생 십일랑(十一郞) 이었다. 당시 15세였는데 후에 우현제 일등종실이 되어 형인 여심제 종좌(如心齊 宗佐)와 더불어 천가에 비약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리큐의 도통을 지켜려는 자각을 바탕으로 엄격한 참선을 거듭했다. 그 결과 천가7사식(千家七事式) 제정의 결실을 보아 이천가 다도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

▣ 9세 불견제 석옹(不見齊 石翁 : 1746-1801년)

불견제 석옹은 8세 일등종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4세였던 1760년에는 보경사(寶경寺)의 법통을 계승하는 스님의 부탁을 받아 현실(玄室)이 궁중에서 다회를 개최 국화향합을 하사 받았다.

그가 43세가 되던 1788년에 사조(四條)가 모가와의 동쪽에서 화재가 발새하여 밤낮 3일을 계속하여 쿄토의 9할이 불타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두 이천가 집에 연소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집기, 보물 등을 건져나올 수 있었다.

이 큰 화재로 소실된 천가의 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현실의 큰 숙제였다. 다음 해에 재빨리 건물을 복구 재건하여 리큐 5백주기 다회를 개최하였다. 일등에 의한 다도중흥에 이어 새 이천가 다도의 방향을 확립한 불견제는 1801년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10세 인득제 백수(認得齊 栢수 : 1770-1826년)

9세 석옹(石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우은(又隱)에서 첫 다회를 개최했다. 다가의 행사로서 또한 다사 자체로서 가장 중요한 첫 다사를 14세 때 개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이천가 10세를 계승한 인득제(認得齊)는 에도시대 후기의 성숙한 문화의 정점에서 이 시대를 정관하면서 1807년에는 막부의 실력자를 비롯한 많은 무사들과 부를 쌓은 평민을 초청한 가운데 元佰宗旦 150주기, 一燈 50주기, 小庵 200주기, 不見齊 13주기, 25주기, 태수 100주기 등 많은 遠忌茶會를 개최했다.

인득제는 장남을 비롯하여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자 삼하국오전영주 (三河國奧殿領主) 송평승우(松平乘友)의 아들 영오랑(榮五郞)을 양자로 삼았다. 영오랑은 상제(相齊)의 딸 마찌꼬와 결혼해서 이천가 11세를 계승해서 현현제 종실(玄玄齊 宗室)이 된 사람이다.

▣ 11세 현현제 종실(玄玄齊 宗室 : 1810-1877년)

현현제는 1819년 10세 때 이천가 10세 인득제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송평승우(松平乘友), 형 승선(乘羨)과 인득(認得) 과의 다도를 통한 깊은 관련을 말해준다.

현현제 이천가 11세를 계승하고서는 다이묘(大名:번주)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과 이천가가 발전을 생각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현현제는 여러지방 다이묘가에 출사했고 그들과 교류했다. 출사와 교류의 범위가 넓었다. 현현제에게 차 상자에 대한 기호가 많았던 것은 각지방을 왕래하면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천가 11세 당수가 된 후에 최초이자 최대의 행사는 리큐 2백50주기의 법요와 다회였다. 이 행사를 위해 현현제가 리천가의 모습을 크게 바꿀 정도의 대대적인 공사를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 정변이 일어난 1860년에 현현제는 궁중에 헌다(獻茶) 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왕실당국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같은 경사를 축하하여 "화건점(和巾点)을 부흥하고 그 피로연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상황의 흐름은 현현제에게 즐거운 것이 못됐다.

격동하는 세대는 전통문화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871년에 양자를 맞아들어 딸과 결혼을 시켰다. 이 양자가 12세를 계승한 우묘제(又妙齋)이다.

▣ 12세 우묘제(又妙齊 : 1852-1917년)

현현제에게는 2남1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요절하고 2남 일여제(一如齊)도 17세까지는 성장했으나 역시 젊어서 죽었다. 그후 그의 외동딸 유록자( 猶鹿子)가 22세 때 교토의 명문가이며 거상인 각창다궁현령 (角倉多宮玄寧) 의 2남을 양자로 맞이했다.

그가 이천가 12세가 된 우묘제 직수종실(直수宗室)이다. 그의 부인 유록자는 후에 진정원(眞精院)이라 칭하고 당대 제일의 여류다인이 된 여걸이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구길(駒吉)이라 했다. 후에 13세가 된 원능제 종실(元能齊 宗室)이다. 구길이 14세가 된 1885년 우묘제는 집안을 물려주고 산기(山崎) 묘희암(妙喜庵)에 은거했다.

우묘제 만년을 장식하는 최대의 다회는 1909년의 현현제 33주기이다. 2년 전에는 "금일암월보(今日庵月報)" 와 " 소습사1개조 전기"가 발간되었고 1903년에는 우묘제 원능제의 공저 "다도병(茶道병)의 진사 (眞砂)가 발간되어 종가 스승의 노력에 의한 이천가 다도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 13세 원능제 철중(元能齊 鐵中 : 1872-1924년)

원능제가 18세 된 1889년에 부친 우묘제가 은퇴하고 종실을 이어받아 13세 종실이 됐다. 다음 해 결혼한 그는 금후 다도계의 중심은 도쿄가 된다고 생각하고 신혼초에 도쿄로 가서 지반확립을 추진했다. 이때 원능제는 각 왕실 귀족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게 되었으며 왕의 친척 북백천능인 (北白川能人) 으로부터 "원능(元能)"이란 재호(齋號)를 받아 이때부터 원능제라고 칭했다.

불혹의 나이가 된 원능제는 학교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다법으로 "분략다법(盆略茶法)" 이라는 새 예법을 고안했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격식을 부활하는가 하면 새규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차, 꽃, 향을 조합한 사우지식 (四友之識)을 7사식(七事式)의 하나로 추천한 것이 그 하나다. 새로운 시대에 대응해서 많은 새로운 다법을 고안한 원능제는 1924년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 14세 무한제 석수(無限齊 碩수 : 1893-1964년)

원능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쿄토 부립사범학교 부속 유치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원능제 제자 부인의 권고로 동지사(同志社) 보통부에 입학했다. 이 무렵 원능제의 다도보급이 결실을 보아 동분서주한 나날이 시작된다.

18세 때 교토에서 불사 헌다식을 했고 다음해 종가의 적자로서 최초의 다사를 개최했다. 1940년 이천가의 통합을 위해 람교회를 결성, 전국 각지에 설치하여 지방문화의 향상을 꾀했다. 1949년엔 재단법인 금일암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고 리큐 이래의 유적보존사업을 했다. 1957년 오랜 다도진흥과 문화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

▣ 15세 붕운제 종실(鵬雲齊 宗室 : 1923 ~)

鵬雲齊 무한제 석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동지사(同志社) 대학 법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하와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중 해군 비행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특공대원으로 활동하다가 패전으로 생환,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는다.

1951년 그는 다도사절로서 단신으로 도미한 이래 유럽, 남북아메리카, 중근동, 동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50개국을 순방하면서 다도보급과 평화를 역설하고 다녔다.

1964년 14세인 무한제 석수종실의 사망에 따라 리큐거사 15세를 계승 금일암주 (今日庵主) 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전통문화 계승자의 대표적인 역활을 수행하고 사회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일본청년회의소 회장, 국제청년회의소 부회장, 중앙교육심의의원, 대학심의의원 등 많은 요직을 역임했고 또 하와이 대학교수, 중국 천진상과대학 객원교수로서 강의도 하는 등 차를 통해 세계평화와 국제협력에 기여하고 있다.


 - 자료출처 : 다담 (1994년 8월호)

 - 자료편집 : 199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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