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프로필

Contact Us

 茶인연

 茶詩民謠

 茶文化史

 茶人

 茶/茶器/茶具/茶田

 茶寺

 茶文獻

 中國茶文化

 中國茶

 中國茶器

 日本茶文化

 日本茶

 日本茶器

 게시판

 새소식

 갤러리

  日本茶文化

  경도(京都)의 울산동백


Ⅰ. 蔚山冬柏과 京都의 椿寺

Ⅱ. 히이라기노(桐野)의 울산동백(蔚山桐柏)

Ⅲ. 센리큐(千利休)와 울산동백(蔚山冬柏)


Ⅰ. 蔚山冬柏과 京都의 椿寺)

울산동백 일본에서는 보통 동백나무를 정원에 잘 심지 않는다 한다. 왜냐하면 동백은 가지 사이로 꽃을 활짝 피운 다음 꽃잎이 질 때 한꺼번에 땅에 떨어지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곧잘 사람의 목숨과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백은 일반 가정집의 정원수로서는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나무이다. 특히 입원해 있는 사람의 병문안을 갈 때에는 동백꽃을 가져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동백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백나무가 정원수로서 환영받는 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차고있는 칼 하나에 목숨을 거는 무사계급이라던가, 인생을 일장춘몽으로 보는 불교의 사원에서는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동백의 속성을 좋아했다. 그러한 동백을 사무라이와 승려들은 인생에 비유하여 곧은 절개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좋아했던 것이다.

옛날 울산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동백의 속성과 정반대되는 동백이 있었다. 그 동백은 가지에 꽃을 피울 때는 다섯 색깔의 꽃을 피우며, 또 질 때는 꽃잎 하나 하나 떨어뜨리는 속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야말로 일반적인 동백속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희귀한 식물이었다. 이러한 동백나무가 언제부터 울산에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왜군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강토를 유린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울산에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증거가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땅에는 남아있지 않으며(그 뒤 울산에 자라고 있는 것이 발견됨), 그것이 바다 건너 이국땅인 일본에 그 흔적이 보존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동백을 "오색팔중산춘 (五色八重散椿)" 이라는 긴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이유도 앞에서 말한 희귀한 속성 때문인 것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울산의 향토문인이자 언론가인 최종두씨로 부터 울산의 동백이 일본의 춘사 라는 불교사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곳을 찾아 간 것은 12월 24일이었다. 이 절은 쿄오토시(京都市) 북구(北區)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사찰이었다. 마침 이 곳의 주지는 임진왜란 때 치열하고 참혹했던 울산전투의 상황을 만년에 정리하여 "조선이야기 (朝鮮物語)" 라는 기록문헌을 남긴 오오꼬우찌 히데모토 (大河內秀元) 와 같은 성씨인 오오꼬우찌 존무 (大河內存無)씨가 살고 있었다. 오오꼬우찌라는 성씨는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성씨이다. 그러므로 오오고우찌씨가 그 절의 주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으로 돌릴 수 없는 어떤 필연성을 느끼게 하여 주었다.

춘사의 주지인 오오꼬우찌씨는 대처승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그 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 전날 우리는 애걸하다시피 전화로 주지와의 면담신청을 하였으나 그는 부인을 통하여 건강상의 이유로 우리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우리의 실망은 너무나 컸다. 우리가 쿄오토로 간 유일한 목적이 춘사에 있는 울산의 동백나무를 직접 보고 그에 대한 유래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성사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쿄오토여행은 시간과 금전만 탕진하는 허무한 결과를 초래하는 우스운 꼴이 되고만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그 작전은 다음날 착오없이 진행되었다. 먼저 주지는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그 나무만이라도 보여달라고 애원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아내어 일단 절 안으로 들어가 사진촬영을 하면서 주지의 부인과 인터뷰를 기습적으로 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춘사의 동백나무는 조선의 울산에서 건너온 것이라 했다. 그에 관한 문헌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것이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 발행하고 있는 소책자 안내문에도 그러한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에 의하면 이 곳의 동백나무는 임진왜란 때 울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가토오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울산성에서 가지고 가 그의 군주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바쳤던 것을 히데요시가 다시 그것을 이 절에다 기증을 한 것이라 한다.

이 절은 히데요시가 다도회 (茶道會)를 여는 장소로서 자주 이용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울산의 동백을 하사받은 춘사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매우 소중히 이를 키웠다. 그 결과 지장원 (地藏院)이라는 분래의 이름보다는 동백나무의 절이라는 의미의 이름인 "쯔바기데라 (椿寺)"로 더 잘알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잠시 만나 본 쿄오토사람들도 그러했다. 즉, 그들은 지장원이라는 절은 잘 몰랐으나 "춘사"라는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동백나무의 특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백나무가 한국의 울산에서 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울산에서 가토오 기요마사에게 납치당하여 일본으로 건너 간 동백나무의 1세는 이 절의 뒷뜰에 있었다. 400여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풍파에 견디지 못하여 그만 노쇠하여 지금으로부터 9년전인 1983년에 밑둥치만 남겨놓고 가지는 모두 잘려지고 남아있지 않았다. 잘려진 밑둥치는 비닐에 싸여져 있었으며, 그 주위에 다시 새롭게 키운 동백의 묘목이 십여그루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자식격인 2세의 울산 동백나무가 앞마당에서 번창하여 가지를 땅에까지 늘어뜨리며 건강하게 서 있었다. 현재 울산동백의 2세는 100세 가량의 나이를 먹었으며, 매년 3월하순 부터 피기 시작하여 4월말 까지 왕성하게 꽃을 피우는데, 그 때는 한잎 한잎 떨어진 꽃잎과 다섯 색깔의 동백나무 꽃잎으로 정원에 가득차 일대의 장관을 이룬다고 주지승의 부인이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절은 비록 규모가 작은 사찰이라 해도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된 유서깊은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230여년 전 행기(行基)라는 승려가 성무천황의 명을 받아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본당에는 행기가 직접 만들었다는 지장보살상이 보전되어 있다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 사찰을 창건한 행기가 왕인박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행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나라시대의 불교승려로서 보살이라고 불리울만큼 전도와 자선사업을 많이한 고승대덕이다. 그의 아버지는 코시노사이찌 (高志才智)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하찌타노코니히메 (蜂田古미比賣) 이었다. 그의 부계 (高志氏族)은 백제계 이주인으로서 일본역사를 편찬하는데 주로 참가한 "후미씨족 (書氏族)"의 한 분파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 절은 창건 때 부터 한반도와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제인의 후손이 세운 절의 정원에 그것도 전리품으로 한국에서 가져간 울산동백이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임진왜란때 울산전투의 참혹함을 기록으로 후세에 남긴 오오꼬우찌 히데모토와 같은 성씨를 가진 자가 울산동백이 있는 춘사의 주지가 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 하더라도 돌고 도는 역사의 운명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더라도 일본의 춘사에 있는 울산동백의 존재적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Ⅱ. 히이라기노(桐野)의 울산동백

춘사의 주지승 부인은 기습적인 인터뷰에 대해 불쾌함을 느껴음인지 시종 쌀쌀함과 경계의 눈초리로 우리를 대하였다. 묻는 질문에는 거의 안내책자에 기록된 내용으로 부터 되도록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형식적인 대답만을 하였다. 가령 현재의 주지인 오오꼬오찌씨는 옛날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종군기를 남긴 오오꼬오찌 히데모토와의 관련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하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 대답을 회피하여 갔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다음 기회로 미루어 조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악조건의 인터뷰에서도 의외의 성과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 나무에 다섯 색깔의 꽃이 피며, 질 때는 꽃잎 하나 하나 떨어지는 울산의 동백나무가 지장원의 춘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던 것이다. 울산의 동백은 코오토에서는 춘사를 포함한 법연원 (法然院), 서방니사 (西方尼寺)라는 불교사찰과 히이라기노 (桐野)라는 지역의 어느 농가에 각각 한그루씩 있으며, 그리고 쿄오토의 인근지역인 나라(奈라)에 백호사(白毫寺)라는 절에도 1그루가 있다는 것을 춘사의 주지승 부인으로 부터 들었던 것이다.

만일 그 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토오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가져간 동백은 한 그루가 아닌 셈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한그루가 아닌 몇 그루의 울산동백을 그의 주군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으며, 이를 다시 풍신수길이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오늘날과 같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일본의 울산동백은 춘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실은 울산동백의 여러 그루가 가토오 기오마사에게 강탈되어 일본에 정착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울산동백을 찾아보기 위해 길을 서둘렀다. 그 중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이 "히이라기노"에 있는 농가였다. 정확히 말해 그 집은 "京都市 上가茂北原町 45番地"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그곳에는 오쿠무라 히데쯔구씨의 일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의 집안은 선조대대로 울산동백과 함께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고 한다. 울산동백은 그 집의 앞 마당 길쪽으로 나있는 담쪽에 우뚝 서 있었다. 춘사의 울산동백 1세와는 달리 매우 건강하고 덩치가 큰 거목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매년 4월초경이 되면 꽃을 한창 극성스럽게 많이 피우는데, 그 숫자가 얼나마 많은지 나뭇잎이 꽃에 가려 보이질 않을 정도라 한다. 그리고 꽃잎이 커서 모르는 사람은 목단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울산동백이 언제부터 어떠한 연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 집 주인인 오쿠무라씨가 그에 대해 자신의 집 동백나무는 춘사의 울산동백과 같은 종류의 묘목이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의 선조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 부터 하사받았을 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그 증거로서 정확한 이름은 전하여지고 있지 않지만 자기 집안의 시조가 토요토미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의 첩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조가 토요토미와 각별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은 다분히 높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는 토요토미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를 비롯한 동부지역의 무사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그의 시조는 토요토미의 측근으로서 전쟁에 참가했을 정도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와는 각별한 사이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토요토미를 경우, 울산동백이 현재의 이 곳으로 오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추정이자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조가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직접 울산에서 동백나무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한 우리들의 물음에 대해 중등학교에서 지리과 교사를 하고 있다는 이 집 주인 오쿠무하씨는 그저 쓴웃음으로 응대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선조가 참가했다는 전쟁은 일명 "세키가하라 (關原)의 전투"로 불리우는 일본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전투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토구가와는 토요토미에 이어 일본무사의 총우두머리가 되어 에도막부를 여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토구가와는 임진왜란 때 그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웃나라와 전쟁을 한 일이 없는 토구가와가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여 쇼우군(將軍)이 된 것이다. 그가 세운 토구가와 막부시대에는 "조선통신사"로 표현되듯이 한일관계는 아픔으로 얼룩진 앞의 시대와는 달리 우의로 다져진 선린관계가 지속되었다. 적어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방과 같은 일본의 무력적인 힘이 해외로 뻗쳐가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오늘날 일본이 이웃나라의 반감을 싸는 것도 무력때문에 생긴 것이다.


Ⅲ. 센리큐(千利休)와 울산동백

울산동백은 쿄오토의 서방니사 (西方尼寺)에도 또 한 그루가 있었다. 이 절은 천태진성종 (天台眞盛宗) 이라는 종파에 속하는 절이었으며, 또 여스님들만 거주하는 사찰이었다. 우리가 이 절을 찾아간 것은 춘사의 주지 부인으로부터 이 곳에 울산동백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떠한 연고로 이 절에 울산동백이 와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초의 일정을 늦추어 그 곳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의 취재진들이 택시를 타고 이 절에 도착하였을 때는 절의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열심히 두드리고 두드린 끝에 아주 깨끗하게 생긴 여자 스님이 한분 나와 우리를 맞이 하여 주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우리를 처음에는 매우 경계하는 듯 대하였으나, 명함을 내밀면서 우리의 신분과 찾아간 목적에 대하여 열심히 솔직하게 설명하자, 겨우 안심하였다는 듯이 울산동백 나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이 절의 주지스님까지 만나게 해주었다.

울산동백은 아무나 볼 수 있는 절의 앞 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 거주하는 식구들만이 볼 수 있는 뒷 뜰 그늘 진 곳에 홀로서 있었다. 나무의 높이는 약 10미터 가량 되었고, 그리고 밑둥치의 둘레는 110센치 정도 되었으며, 나이는 약 400년 된다고 했다. 나무의 옆에는 춘사에서도 보았던 "오색팔중산춘 (五色八重散椿)" 이라는 팻말이 꽂혀져 있었다.

이를 보더라도 춘사의 울산동백과 같은 종류의 수목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지에게 울산의 동백나무가 이 절에 오게 된 경위를 묻자,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에 센리큐 (千利休)라는 자가 토요토미 로부터 그 수목을 하사받아 이 곳에 심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동백나무는 원래 춘사의 동백과 같은 묘목이었다. 그러던 것을 춘사와 나누어 이곳에 가지고 온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동백이 조선에서 왔는지 안왔는지는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동백이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울산에서 온 것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설명대로 이 절의 동백이 춘사의 동백과 같은 묘목에서 나뉘어 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울산에서 건너 간 것이 움직일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보았듯이 춘사의 동백은 임진왜란 때 기토오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가져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사실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도 이 절의 동백은 그의 고향이 울산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나이가 400년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이 나무는 토요토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춘사의 동백과 히이라기노의 동백과 모두 공통되는 점이다. 즉, 춘사의 동백은 오쿠무라씨의 선조가 히데요시로 부터 하사받아 심었듯이 서방니사의 동백나무도 센리큐가 히데요시로 부터 하사받아 이곳에 심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이 곳의 동백은 울산에서 건너간 것임에 틀림없다.

주지의 말을 빌리면 이 나무를 심은 센리큐는 무척이나 이 나무를 좋아 했다 한다. 센리큐는 일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문화 중에서도 가장 진수라 할 수 있는 다도 (茶道)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종(禪宗)의 불교사찰에서 차를 마시는 문화의 습관을 무사계급을 포함한 일반 민중들에게 까지 널리 파급시켰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 여성들의 예절교육을 다도를 통하여 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이 센리큐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일본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큰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출신이 귀족도 무사도 아니었다. 원래 그는 오사카의 "사카이"라는 곳에서 생선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전형적인 서민의 아들이었다. 그러한 그가 선종의 승려들로 부터 열심히 차문화를 배워 그것을 일반화시키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특히 그의 다도를 즐기면서 문화인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던 토요토미에게 중용되었다. 이 때 그가 토요토미로 부터 울산동백을 하사받아 서방니사에 심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울산동백만 좋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다완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미적감각은 눈에 보이는 표면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세계에 깊이 간직된 그윽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므로 화려하게 생긴 다완보다는 단순하게 보이면서도 그 속에서 무한한 변화와 아름다움을 자닌 다완을 좋아했다. 여기에 꼭 맞는 다완이 일본인들이 "코라이 쟈완(高麗茶婉)"이라 부르는 조선의 도자기였던 것이다. 이 때 주로 사용된 조선도자기는 고급의 그릇이 아니었다. 조선의 서민들이 일상 사용하던 잡그릇에 속하는 소박한 것들이었다. 바록 그것이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방하고 어떤 일에도 굽히지 않는 늠름한 기풍을 지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센리큐를 포함한 일본의 다인(茶人)들에게 애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그릇은 일명 "이도쟈완(井戶茶婉)" 이라고도 불리웠지만 "토토야" 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여기에서 "토토야"라 함은 센리큐의 생가인 샌선가게의 이름을 따 붙여진 것이다. 그 만큼 일본다도의 완성자 센리큐는 울산동백과 조선의 도자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지금도 서방니사에는 토요토미와 센리큐가 다도회(茶道會)를 개최할 때 사용하였다는 우물이 울산동백과 함께 소중히 보존되어 있다.

토요토미에게 중용된 센리큐는 훗날 그의 주군인 토요토미와 심한 갈등과 대립을 빚게된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토요토미로 부터 자결하라는 언도를 받고 할복하고 죽는 불운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가 심은 서방니사의 울산동백은 아직도 의연히 오늘을 지키고 말없이 서 있었다.


 - 자료출처 : 일본속의 한국(노성환 著), 울산대학교 출판부(1994년 3월 15일 발행)


 '日本茶文化'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