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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타(有田)의 조선도공


Ⅰ. 아리타(有田)의 조선도공

Ⅱ. 李參平과 陶山神社

Ⅲ. 이참평 그는 어떤 이유로 일본으로 갔을까?

Ⅳ. 이참평 그의 고향은 어디일까?

Ⅴ. 百婆仙과 深海宗傳

Ⅵ. 아리타의 긴모산 도공

Ⅶ. 일본첩자 宗歡儀


Ⅰ. 아리타(有田)의 조선도공/

석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흔히 도자기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왜냐하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을 쳐들어 온 왜군들이 조선의 도공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세계적 으로 그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었다.

대개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들이 집단을 이루며 한 곳에 모여 살았다. 그러한 곳이 일본의 여기저기에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규슈(九州)의 아리타(有田) 라는 곳이었다. 특히 이 곳은 일본에 있어서 최초로 조선인의 도공에 의해서 백자를 생산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리타에 조선도공들을 살게한 장본인인 나베시마 (鍋島直茂, 이방자씨와 관련 있음) 였다. 그는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봉건영주로서 임진왜란이 발발 하였을 때 기토오 기요마사 (加藤淸正)의 휘하 장수로서 조선에 출병하였다. 그 때 그는 조선인 도공들을 가장 많이 잡아간 사람으로도 유명한데, 그중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그의 부대가 울산의 서생포와 좌병영을 거쳐 경주로 진군 하였다는 행군기록이 발견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때 울산지역의 도공들을 강제 납치하여 일본으로 끌고 갔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 곳은 조선의 도공들이 오기전에는 "다나카마을 (田中村)"이라 불리우는 인구 2,000명의 조그마한 시골이었다. 그러한 시골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릇 900명 가량되는 조선의 도공들이 이 곳에 몰려 들어와 도자기를 생산하여 판매함으로써 경제적인 부를 축척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도자기 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입지조건으로서는 흙과 땔감과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을 완벽히 갖춘 곳이기에 봉건영주인 나베시마는 조선에서 잡아온 도공들을 대거 이 곳에 투입시켜 거주케 하고, 보통 일본인들 보다 더 대우를 해주었을 뿐만아니라 조선 도공들이 들어오기 전 아리타에는 이미 기존의 일본인의 도공들이 살았었는데, 나베시마는 이들을 다른 곳으로 내쫓은 다음 조선인 도공들을 이 곳에 살게 했다는 것이다.

권력자 나베시마는 자기의 동족인 일본인 도공들을 추방하면서까지 조선의 도공들을 우대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단순한데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품적 가치때문이 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센리큐(千利休)가 완성시킨 다도(茶道)가 유행했다.

다도가 일반사회에 보급되면 될수록 고급의 도자기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적 욕구에 만족시켜줄 수 있는 기술이 일본인의 도공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도공들이 전쟁의 포로이면서도 일본의 권력층으로 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곳에 끌려온 도공들은 어디서 왔는가? 문헌적 기록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 조선인 도공들이 초기 생산단계에서 남긴 도자기의 양식과 나베시마 군대의 조선행군로를 면밀히 조사하면 울산, 김해, 경주등의 도공들과 함께 오늘날 아리타 도자기의 기틀을 만들었음을 충분히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리타 역사민속자료관장인 이데 세이지로오 (井手誠二郞)씨의 말을 빌리면 현재 이 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400여년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도공들의 후예라고 했다. 이 곳 주민들 중에 "가네가에(金江), 토쿠나가(德永), 후카우미(深海), 마쯔모토(松本), 후루타(古田), 이와나가(岩永), 히사토미(久富)"라는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조선도공의 후예임에 틀림이 없다고 했다.


Ⅱ. 李慘平과 陶山神社

아리타의 역사민속자료관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도산신사 (陶山神社)였다. 이 신사는 아리타 역에서 서쪽으로 위치한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신사에 간 것은 이 곳 도자기와 관련된 신들이 모신 곳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지만 조선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하는 것이 보다 더 궁금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도자기의 본 고장의 신사인 만큼 도산신사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신사의 도리이(鳥居)를 대개 나무 또는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신사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그것을 도자기로 만들어 세워놓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사 본 건물 앞에 놓여진 고마이누(高麗犬), 난간등도 모두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 신사에서 모셔지고 있는 신은 모두 합하여 3명인데 응신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그리고 이참평이었다. 응신은 역사적인 사실과 관계없이 우리나가를 정벌한 천황으로 잘못 인식되어져 있고, 나베시마도 가토오 기요마사 (加藤淸正) 위하에 들어가 조선 침략에 가담했다가 조선에서 퇴각 할 때 그는 조선도공들을 대거 강제로 끌고가 자기 영지에서 도자기를 생산케 함으로써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다.

이런 침략과 관련된 일본 신들 틈에 이참평이라는 조선인을 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조선 도공들의 대표자로서 아리타에서는 그를 "도자기의선조"라 하며 숭상되고 있는데 말이다.


Ⅲ. 李參平 그는 어떤 이유로 일본으로 갔을까?

참평이 아리타에 온 것은 1616년이었다. 그 때 그는 혼자서 이 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 도공 18명을 데리고 이 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도자기와 관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농사를 짓다가 이참평이 백자를 생산할 수 있는 광산을 발견하면서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에 있어서 최초의 백자생산 이었고, 그후 자손들에게 가르치며 번영을 누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도자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늘날과 같은 도자기 마을 아리타가 생겨난 것이었다.

봉건영주 나베시마도 이러한 이참평의 공로에 대해 크게 치하하였으며, 당시 아리타 고을 군수급이었던 타쿠모리 (多久長門守)는 자신의 하녀를 참평과 결혼시켜 부부까지 되게 하였다. 이와같이 이참평은 일본사회에 알려진 인물이 되었으며 그 후 그는 "가네가에 (金江)라는 일본성씨로 성을 바꾸어 일본인으로 아리타에 영구히 정착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를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붙잡혀 강제로 끌려간 불쌍한 조선도공"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삶을 취재하는 동안 그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에 대해 약간의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그의 후손이 오늘날까지 보관하고 있는 그에 관한 기록을 보고 더욱더 그러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기록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베시마 시게모리의 군대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고 있었을 때,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서 매우 곤란을 당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맞은 편 멀리 떨어진 곳에 집 한채가 보였다. 그리하여 나베시마는 길을 묻기 위하여 부하를 보내었다. 그러자그 집에서 3명의 남자가 나왔다. 그들이 손짓발짓으로 가르쳐준 길을 따라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윽고 전쟁이 끝나고 나베시마 군대가 일본으로 철수 할 때 나베시마는 선착장에서 길을 안내한 조선인 3명을 불러 그들의 이름과 사는 곳 그리고 직업을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두 사람은 농부였고, 참평이라는 사나이는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라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나베시마는 "이번 전쟁에서 너희들은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철수해 버리면 이를 지켜본 마을사람들이 필시 너희들에게 보복을 가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것보다 우리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자기 굽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일본으로 옮겨와 살기를 권했다. 그러자 참평은 그 말을 쫓아 나베시마의 군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상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보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졌던 이참평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에 의하면 적어도 그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도공이 아니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이국땅에서 죽은 영혼은 더욱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 왜군에게 길을 안내하여 왜군들에게 대승리를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일본군에게 있어서는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힘겹게 왜군들과 맞서 싸우던 조선군에게 있어서 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그에게는 길의 안내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민족을 팔고 조국을 판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그것도 조선시대에 일본측이 염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될 수 있는데로 부산포나 일본인들이 왕래할 수 있는데 한정된 곳에서 대부분 만나고 정 한양으로 올려보낼때 가리개를 한다든가 아님 일부러 길을 헷깔리게 해서 한양으로 갔다고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참평의 고향사람들은 그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였으며, 이참평 자신도 그들로부터 살의를 느끼고 있을을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나베시마는 그에게 일본으로 갈 것을 권유함으로써 그는 조국을 떠나 이국땅으로 건너간 것으로 이상의 기록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충격적인 것은 일본의 도예연구가 미스기 타카토시는 그의 저서 "도자기문화사 (岩波書店, 1989년)에서 이참평에 대해 이상의 기록에서 느꼈던 것 보다 충격적인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규슈의 카라쯔(唐津)에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에서 도공들이 건너와 도자기를 구우며 살았다. 임진란 때 조선으로 출병하는 일본군은 조선에 관해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카라쯔에 와 있던 조선인 도공들을 통하여 이참평의 무리들을 알았을 것이다 ...(생략)...

전쟁이 진 일본군이 후퇴할 때 지금까지 일본군을 지원했던 조선인들은 일본에 이주하기를 원했다. 그 중 이참평도 자신의 집단이주에 관해 직접 일본군과 교섭하여 나베시마의 군대와 함께 일본으로 왔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참평과 일본군과의 만남에 대해 미스기는 나베시마 군대가 조선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을 때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서로 내통하고 있었던 사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일본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이참평의 무리들로 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강제로 끌려가 일본인에게 백자의 기술을 가르쳤던 불쌍한 조선인 도공"이라는 이참평의 이미지는 재고되어져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에 있어서 그의 행적만을 평가하는 너무나 좁은 시각으로 그를 보아왔다. 그를 보다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조국에서 한 그의 행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연구가 함께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일본인에게 기술을 전수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데 보다 더 큰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Ⅳ. 李參平의 고향은 어디일까?

이참평의 직계후손이라는 가네가에 삼베이씨 (金江 三兵衛)는 이참평의 13대 직계후손으로서 정확히 말해 西松浦郡 有田町 2075番地에 살고 있었다. 현재 그의 나이는 73세로 가업을 계승하여 도자기를 굽는 도공으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의 부친은 도공이었지만 그의 기술은 부모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했다.

어릴 때 다른 집의 가마에서 잠시 일을 도와 주면서 도자기 굽는 일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것을 기초로 갈고 닦아 오늘날 전문적인 도예가로서 성장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 아리타의 도공들은 무척 가난했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는 도자기 관계의 일을 하지않고, 기관사로서 일본 철도청에서 근무했었다. 현재의 나이 68세인 그의 부인 마야자키 타메노씨는 그 때 직장 동료의 소개로 만나서 1947년에 결혼하였다 한다.

슬하에는 2남2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어렸을 때 죽고, 딸 둘은 현재 모두 출가해 있으며, 차남 가네가에 쇼오헤이 (金江省平)씨가 가계를 이어 도공 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삼베이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에게 불연듯이 이참평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충남 금강유역 인줄 안다"라고 간략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참평을 충남 금강 출신이라고 믿고 있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의 후손이 기록한 문서에 이참평은 "금강(金江)의 사람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조선의 성씨를 버리고 일본의 성씨를 택하였을 때 자신들의 고향인 금강의 이름을 따서 "가네가에 (金江)"이라 했다고 전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의 고향이 현재 충남의 금강유역일까? 여기에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학자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데씨와 유화준씨이다. 그들이 이참평의 고향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논리적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그 첫째의 이유로서는 그의 출신지가 조선의 금강이라고 표시는 해놓고 있지만, 그 표기된 한자가 "금강(錦江)이 아니라 금강(金江)" 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미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충남 금강의 한자표기는 쇠금자 (金)가 어니고 비단금자(錦)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한자의 표기가 명백히 틀리게 기록되어 있는 이상, 굳이 그 지역을 현재의 錦江으로 보는데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더욱 더 강하게 뒷받침하여 주는 두번째 이유는 조선에 있어서 나베시마 군대의 행군지역이다. 이참평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는 나베시마와의 관계를 배제하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베시마가 이참평을 데리고 간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나베시마가 그의 군대를 인솔하여 행군하였거나, 주둔한 곳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을 현재 충남의 금강유역으로 보면 이러한 당연한 논리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조선에 있어서 나베시마의 군대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만 전쟁을 수행 하였을 뿐, 대전 부근 금강유역에는 한번도 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베시마가 금강유역에서 이참평을 데리고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었다. 따라서 문헌에 기록된 이참평의 고향 金江은 마땅히 충남의 금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현재 이들은 이참평의 고향을 금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이참평의 고향은 한반도의 남부지방에서도 특히 김해, 경주, 진주, 남원 등일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타인들은 거금 4000만엔을 모금하여 현재의 금강유역을 그의 고향으로 보고 그곳에서 가까운 계룡산에다 이참평의 기념탑을 세웠다 한다. 당시 도공들의 임금이 월평균 15-20만엔 이었고 아리타의 인구가 15,000명 이었던 점등을 감안한다면 결코 그 금액은 적은 액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금을 투자하여 이참평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여 세운 충남의 금강이 이참평의 고향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얼마나 우습고도 슬픈일이 아니겠는가? 마치 그것은 조국을 배신했을지도 모르는 이참평을 일본인들에게 백자의 기술만 전해준 것만을 가지고 그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제삿날에 대거 일본으로 몰려가 제사를 지내며, 그것도 모자라 그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민족의 영산인 계룡산 허리자락을 기분좋게 내어준 성급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대전 엑스포측으로 부터 자신의 작품을 출품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고 드디어 도자기를 통하여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Ⅴ. 백파선(百婆仙)과 심해종전(深海宗傳)

수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아리타에 이주하여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참평과 같이 자신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그 만큼 무명의 도공들이 많았던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의문에 대해 이데씨는 1828년 아리타에는 마을전체가 다 타버리는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아야기를 주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던 대부분의 문헌기록이 소실되 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리타의 초창기 역사를 복원하는데 여간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타에 와 있었던 도공들이 조선의 어떤 지역에서 건너왔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참평과 별개의 그룹에 속하는 또 하나의 조선도공들의 집단을 소개하였는데 그 집단의 대표적인 인물이 백파선 (百婆仙)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아리타에서 이참평 이외에 조선도공의 이름은 거의 없었기에 새롭게 등장한 화제의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데씨에 의하면 백파선에 관한 기록은 문헌이 아니라 그녀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비석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비석은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간략히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 관한 사정파악이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 비석은 아리타의 보은사 (報恩寺)라는 절에 있으며, 보통 이 비를 "萬了妙泰道婆之塔" 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녀가 죽어 절에서 받은 법명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되던 1705년 3월 10일에 그의 증손인 심해종선 (深海宗仙)이 세운 것이라 한다. 그 비석에 다음과 같다.

백파선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의 심해(深海) 사람이다. 文錄의 役(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선을 쳐들어 갔을 때 "타케오(武雄)의 영주 고토오 이에노부 (後藤家信)도 종군하였다.

이에노부가 귀국할 때 백파선 부부는 광복사의 승려 별종화상(別宗和尙)을 따라 일본의 타케오로 건너와 수년간 그 곳 광복사의 절 앞에서 살았다. 이윽고 백파선 부부는 이에노부로 부터 토지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자신이 만든 도자기와 향로등을 이에노부에게 헌상하였다.

그 때 그녀의 남편은 조선의 이름을 버리고 신타로오(新太郞) 라는 일본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생산한 도자기를 그의 이름을 따 신타로오야키 (新太郞曉)라 했다. 법호는 "천실종전 (天室宗傳)" 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백파선은 그 곳을 떠나 아이타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이유는 아리타에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양질의 흙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녀는 혼자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많은 조선도공을 데리고 이 곳 아리타로 이주하여 도자기를 생산하며 살았다. 그녀는 1656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으며 그녀의 나이 96세 였다. 자애로운 성격과 온화한 얼굴 그리고 두텁고 복이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여 백파선 (百婆仙)이라 불렀다.

그들은 타케오 영주 고토오 이에노부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심해라는 지명이 현재 우리나라 어디를 가르키는 지명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이데씨는 김해라고 단정했지만 알 수 없다.

오늘날 그의 후손들은 도자기를 생산하지 않고, 다만 "三龍堂"이라는 도자기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심해종전의 직계남자 후손은 대가 끊겨 존재하지 않았고, 여자의 후손이 三龍堂의 사장으로 일흔가까이 되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다. 현재의 그녀도 사람들은 "백파선 할머니"라 정답게 부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언젠가 그의 남편 신카이 히로시씨와 함께 선조의 고향일지 모르는 김해를 방문하여 심해종전의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갔다 한다.


Ⅵ. 아리타의 긴모산 도공

아리타에는 조선도공들의 유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참평, 백파선 과는 또 하나의 조선도공들의 고향을 전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1773년경의 기록인 "이에나가(家永)" 집안의 문서에 의하면 1594년 나베시마군은 조선의 "긴모산" 부근에서 도공 3명을 데리고 귀국했다는 기사가 보이며, 또한 1839년경의 기록인 일명 "宗歡文書"에는 그에 대해 보다 상세히 언급하고 있었다.

나베시마가 출병하여 조선에 있었을 때 다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종환의(宗歡儀)라는 자가 진귀한 조선의 도자기를 선물로 바쳤다. 이를 받은 나베시마는 매우 기뻐했다. 그 후 나베시마는 종환의와 함께 귀국하여 "우리의 영지에서도 조선의 도자기를 생산하고 싶다. 도공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 없겠는가?" 하고 말을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종환의는 조선으로 건너가 길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긴모산" 에서 남경풍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공 8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로 하여금 아리타에 정착시켜 질 좋은 조선의 도자기를 생산케 했다는 것이다. 종환의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그 곳에서 생산된 도자기의 판매는 모두 그가 맡아서 했다 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길주의 서남쪽 "긴모산"에서 살던 조선도공들이 종환의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긴모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종환의가 끌고온 조선도공들은 어디출신 인가? 이데관장을 비롯한 아리타 향토사학자는 긴모산을 금오산으로 보는 견해를 밝히는데 아직 정확한 것은 없다.

금오산이라 해도 지명이 한 두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미, 경주, 포항 영일만, 하동군 백연리 근방등에도 금오산이란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성급하게 경주의 금오산이 긴모산이라 생각하여 일제시대 때 남몰래 아리타도공들의 기념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아리타에서 심심찮게 들리기도 한다.


Ⅶ. 일본첩자 宗歡儀

조선의 긴모산에서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간 종환의라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어떠한 일본사람이었길래 긴모산 기슭에 도공들이 있는 줄 알았을까? 문헌 자료인 御用唐人町荒物唐物屋職御由緖之次第佐之通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종환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종환의는 원래 조선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어와 일본어에 모두 능통했다. 그는 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를 섬기게 되어 일본의복을 입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살았다.

그런데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 옷을 입고 상인으로 위장하여 조선측의 정보를 수집하여 나오시게에게 알리곤했다. 가령 그는 조선의 성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팔고 다니면서 병사들의 수는 물론, 군대의 약점과 강점, 그리고 식량 사정등 군사정보를 상세히 파악하여 나오시게에게 알렸던 것이다. 특히 그는 가야산 전투와 울산의 전투 시에도 그러한 간첩활동을 하여 전과를 올리는데 큰 역활을 하기도 했다.

그가 어떠한 이유였는 지는 모르지만 일본으로 들어가 살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측의 첩자로 활약하여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였던 인물이 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었기에 긴모산 기슭에 도공들이 모여산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조선도공들은 사정을 잘 아는 일본 정보원으로 말미암아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임진왜란때 종환의는 위장술이 뛰어났는지 좀처럼 체포되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때로는 첩자라는 사실이 탄로가 나 체포되기도 했었지만 고문을 당한 후 수감된 곳에서 남몰래 옥졸에게 금은등 뇌물을 주어 감옥에서 탈출했는 적도 있었다.

"종환문서"는 긴모산 조선도공들을 끌고간 종환의의 일본에서 생활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慶長4년(1599년) 4월에 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조선에서 귀국할 때 종환의도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나오시게는 자신의 영지에 종환의가 살 수 있는 주택을 제공하고, 또 하인 10여명도 함께 하사하였다. 한편 그가 조선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가 사는 집 주위의 지역을 唐人町이라 했다.

이렇게 환대받은 종환의는 조선의 물건 몇가지를 나오시게에게 바쳤다. 그러자 나오시게는 매우 기뻐하면서 종환의에게 외국과의 도자기 무역은 물론 도자기의 국내판매에 관한 일까지 모두 그에게 맡겼다. 그러한 연고로 종환의의 후손들은 대대로 무역 일을 맡아보면서 영화를 누렸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듯이 일본측으로 부터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인 10여명을 하사 받았다는 것은 평민이 아닌 무사계급으로서 대우를 받았을 것이며 도자기에 대한 전매권을 그가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제로 그에게 끌려간 긴모산 조선도공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의 도자기를 구워내는 동안 민족을 팔고, 조국을 배신한 조선인 종환의는 호의호식하며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것이다.

긴모산의 조선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간 종환의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고, 우리의 역사상에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될 추악한 조선인이다.


 - 자료출처 : 일본속의 한국(노성환 著), 울산대학교 출판부(1994년 3월 1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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