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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寺

  함월산 기림사(祇林寺)


가. 사기(寺記)

나. 차유적(茶遺跡)

다. 맺음글


가. 사기(寺記)

기림사 전경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27대, 재위 632~647) 12년(643)에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오백명의 제자를 교화한 임정사(林井寺)라 불렀으나 후에 선덕여왕 20년(651)에 원효가 중창하여 주석하면서 기림사(祇林寺)라 불리웠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때에 세워져 23번의 夏안거를 지내신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기'자를, 영취산이 있는 왕사성의 죽림정사에서 '림'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고 하니 함월산의 기림사는 그러한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신라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 화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 전부터 있던 고찰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말기에 각유스님이 이 절의 주지로 있었고, 그 뒤 1578년(선조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13)에는 대화재 본사(本寺), 요사(寮舍) 113칸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경주 부윤(府尹)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으며, 그뒤 고종 15년(1878)에 법당과 여러 건물을 중건,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이 다시 중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경주군 일대를 관장하였고, 광복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절로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 주어 오히려 불국사의 말사로 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등의 병화를 입지 않아 경상도 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 (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 등 중요한 문적과 어필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보물 415호인 건칠불, 삼층석탑, 목탑지 등과 대적광전 외 16동의 건물이 있는 대사찰이다.

가람은 현존하는 건물로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 삼성각, 관음전, 산신각, 주지실, 종무소, 요사채, 산문, 창고 등이 있으며, 산신각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가면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최근 개관한 박물관에는 기림사를 대표할 만한 건칠보살좌상과 1986년 9월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에서 발견된 문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 역시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959호). 전적들은 모두 54종 71책으로 정교한 판각솜씨를 보이고 있고 그 밖에도 지옥과 염라대왕을 묘사한 탱화, 부처님의 진신사리, 와당, 각종 서책등이 즐비한데, 이렇듯 많은 유물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기림사의 지리적 위치로 함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에 위치하여 전쟁이나 기타 재화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림사 주위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계곡을 따라 500m쯤 거슬러오르면 두 암벽의 벌어진 틈새로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치는 용두연이 있고, 용두연과 기림사 중간쯤에 있는 선녀탕의 물이 좋다. 용두연이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이곳에서 쉬다가 동해의 용에게 받은 옥대고리 하나를 냇물에 담그니 그것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 차유적(茶遺跡)

안명수(眼明水)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차유적지이다. 인도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이곳에 와서 창건할 때 임정사(林井寺)라는 우물 정(井)로 절이름을 지었듯이 창건부터가 이 절의 事蹟記에 기록되어 있는 오종수(五種水) 등과 함께 도처에 차유적(茶遺蹟)들이 산재(散在)하고 있다.

특히 기림사는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이 경주시절에 오랫동안 머물던 곳으로 현종 11년(1670) 경주 남산의 용장골에 창건되었던 매월당사를 고종15년(1878)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현재의 매월당사는 사당의 왼쪽 뜰에 놓인 대리석에 '매월당김시습선생제단석 (梅月堂金時習先生祭壇石)'이라 새긴 것과 사당 안의 작은 사진 영정이 매월당사임을 알려주는 전부이다. 그러나 이곳에 봉안되어 춘추로 기림사 주지승의 제향을 받던 영정은 없어졌다.

기림사의 위치는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12㎞ 지점에 위치하고 신라의 명산인 함월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는데 이곳 사적기에 나오는 다섯가지 물(五種水)은 차(茶)를 달이는데 최고의 물로 알려져 있다.

그 첫번째는 기림사 북암 뒷편 아래 있는 감로수로 찻물로는 세상에서 더없는 최상의 물이다. 물 위에 유천(乳泉)처럼 흰 빛이 돌고 있지만 바가지로 떠 보면 그냥 물색인 음수중의 음수(陰水)이다.

두번째 물은 기림사 경내 화정당 뒷마당에 있는 화정수(華井水)는 오래 마시면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세번째 물은 오백나한전 앞의 삼층석탑 밑의 장군수(將軍水)로 이 물을 계속 마시면 물에 기운이 있어 장수가 된다고 해서 장군수라 불리우고 있는데 혹시 반역자가 생길까봐 후에 우물 위에다 석탑을 세웠다 한다. 지금도 고요한 밤 탑 밑에 귀를 기울이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네번째는 기림사 입구 천왕문 앞 담벼락에 있는 안명수(眼明水)로 물 맛도 물 맛이지만 이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물이다.

다섯번째는 지금 없어진 기림사 개울 건너 동암(東菴)의 오탁수(烏啄水)로 까마귀가 쪼은 자리에 물이 나 파보니 감로수(甘露水)가 솟았다 해서 까마귀 烏子에 쪼을 탁(啄)해서 오탁수라 했다.

이상과 같이 기림사의 오종수(五種水)는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차(茶) 의식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창건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光有聖人은 다시 제자를 시켜 이번에는 사라수 대왕이 직접 汲水煎茶의 維那(齊를 올리는 의식 절차를 지휘하는 사람)를 시킴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왕이 듣고 기뻐하며 기림사에 온다. 기림사에 온 왕은 金관子를 가지고 梅檀井의 물을 길러 茶角을 했는데」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기림사가 차(茶)의 거찰(居刹)로써 유서가 깊다는 것을 매월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월당은 이곳에서 오종수(五種水)를 사용하여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우리 고유차(固有茶)를 즐긴 것이다.

다. 맺음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최고(最古) 차유적지로 알려진 기림사의 오종수(五種水)를 복원하여 천하제일의 찻물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우리 차인들이 해야할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동암(東菴)의 오탁수(烏啄水)만을 제외하면 현재 위치가 알려져 있어 복원 가능하고, 오탁수도 대충 동암이 있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기에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발굴과 복원을 통한 자리매김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근자 차인들 사이에는 소중한 우리 차문화를 역사적인 고증을 통하여 찾고, 가꾸려는 노력보다는 눈에 보이는 형식과 동작에만 치우쳐져 있고, 90년 이후 무분별한 중국 차문화 답사 열풍에 편성하여 공산화 70여년 기간 동안 거의 잊혀진 차문화를 서둘러 복원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보다는 최근에 지어져 황량하고 덩거런 일주문을 지나 육우릉에 헌다(獻茶)하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회자되는 씁쓸한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 자료작성 : 不遷(200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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